과거 강력한 무기로 사용되던 화약은 교통, 건설, 산업 등 사회 인프라 체계 전반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화약 기술의 발전, 그 시작에는 20년 년간 끝없는 실패 끝에 최초로 화약 제조에 성공한 ‘최무선’의 뜨거운 열정이 있습니다.
화약(火藥)을 한자로 그대로 풀이하면 ‘불이 붙는 약’입니다. 중국의 연단술사들이 불로장생을 위한 약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명되었기에, ‘약藥’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중국에서 화약은 오랫동안 약재의 일종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화약의 원료인 염초나 유황이 살충이나 온역(염병)을 치료하는 특효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화약은 애초에 사람을 살리기 위한 약재의 일종으로 사용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군사 무기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화약의 거대한 폭발성이 알려지면서 부터입니다. 송나라 시대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화약 무기 제조가 시작됐고, 이는 중국의 군사력을 혁신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에 처음으로 중국 원나라에서 화약 무기를 들여왔는데, 화약을 장착한 불화살은 빠르고 멀리 날아갈 뿐만 아리라, 위력 또한 대단했습니다. 기존의 칼과 활로는 대응하기 힘든 강력한 힘을 가진 화약 무기. 고려는 화약을 만들어 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싶어 했지만, 중국은 화약 제조법을 공유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기술로 화약을 제조한 것은 그로부터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화약을 최초로 개발한 사람은 14세기 과학자이자 무인인 최무선입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최무선은 젊은 시절에 “왜구를 막는데는 화약만 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되뇌었다고 합니다. 계속되는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고려를 지키기 위하여 화약 제조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고려는 지속해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 화약 제조의 비법을 알아내고자 노력해왔고, 화약의 구성 물질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약의 기본 재료인 염초를 추출하는 방법과 그것을 유황, 목탄과 혼합하는 비율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최무선은 이를 알아내기 위하여 각종 문헌을 찾아보고 배가 드나드는 항구를 찾아 중국인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원나라 출신의 염초 기술자 이원을 만나 끈질긴 요청 끝에 마침내 화약 제조법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염초를 만들어 화약을 제조하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과 더 큰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최무선은 자신의 집 안쪽에 실험실을 마련하고, 염초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험했습니다. 무려 20년 동안 실패를 거듭한 끝에 염초를 만드는데 성공 할 수 있었고, 이는 화약 제조로 이어졌습니다.
오랜 집념과 노력 끝에 화약 무기를 만든 최무선은 조정에 화약 무기 제조를 위한 ‘화통도감’ 설치를 건의했고, 그 의견을 받아들여져 1377년부터는 화통도감에서 본격적인 화약 무기 제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제조한 화약 무기는 3년 후인 1380년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최무선은 화약 만드는 기술은 <신전자취염초방>이라는 책에 남겨두었는데, 이 기록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보다 강력한 화약 무기를 만들기 위한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화약은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무기의 역할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광산의 채굴이나 굴착 작업을 넘어 산업 현장 곳곳에서 화약이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통, 건설, 산업단지 등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인프라 전반에 산업용 화약이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8세기 사람을 살리기 위한 ‘약’으로 시작해 전쟁을 위한 화약 무기를 거쳐, 다시 산업 현장 곳곳에서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화약. 사용 범위가 넒어진 만큼 안전에 대한 기준도 높아졌습니다.
600년 전 최무선이 끊임없이 노력을 통해 화약을 개발했듯, 산업 현장에서도 화약을 더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것 입니다.
▣ 계약 Chapter 2. 요청 Requirement 계약에 관련된 사항을 요청할 때에는 상대방에게 이익이 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