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신설] 천연두, 지석영의 기록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전염병 ‘마마’

조선 시대 때는 호랑이가 가장 큰 공포였습니다. 성종은 ‘전국 각지에 호랑이가 넘쳐나 백성의 고통이 심하다’는 관찰사의 보고에, 전국에 방을 붙여 ‘호랑이를 잡는 이들에게 포상하겠노라’ 공포했다. 숙종 29년에는 강원도에서만 5년 동안 300여 명의 백성이 호랑이에게 해를 당했다는 기록이, 태종 때에는 경상도에서만 석 달 동안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으니 ‘마마’라고 불렸던 천연두 입니다.

전염성과 치사율이 높아 한 사람이라도 천연두에 걸리게 되면 마을 전체에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운이 좋아 목숨을 잃지 않더라도 얼굴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 ‘곰보’라 불리게 되니 천연두가 호랑이 보다 무서운 존재였던 것은 당연한 일일 터, 오죽하면 임금을 칭하는 ‘마마’라는 극존칭을 붙여, 어서 지나가기를 바랐을까요, ‘호환 마마’라고 하면 울던 아이도 뚝 그쳤다고 하니, 당시 백성들이 느끼는 공포감이 얼마나 컷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천연두 지석영

지석영, 천연두의 공포에서 백성을 구하다

‘천연두가 나 하나는 비껴가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 이들을 살린 것은 지석영이 최초로 보급한 종두법이었다. 지석영의 아버지는 당대 한의학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던 명의였고,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지석영은 자연스레 사람의 몸과 질병, 그 치료법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됐다. 우리보다 의술이 앞선 서양의 서적들을 접하던 중 발견한 에드워드 제너의 우두법은 지석영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우두란 소에게서 발병하는 천연두를 의미하는데, 에드워드 제너는 우두 바이러스를 이용해 치료법이 없어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전염병을 예방할 백신을 개발한 것입니다.

책으로만 우두법을 접했던 지석영은 1879년 홀로 부산에 내려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재생의원에서 우두법을 배웠습니다. 이후 우두의 원료인 두묘를 구해 충주에 있는 어린 처남에게 최초로 우두법을 시술했는데, 훈날 지석역은 이역사적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의 평생을 통해 볼때 과거에 합격 했을 때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왔을 때가 크나큰 기쁨이었는데, 그때(처음으로 우두를 실시했을 때) 비하면 아무것도 아녔다’

하지만 두묘를 직접 제조하지 않는다면 우두법 보급에 한계가 있음을 느꼈고, 1880년 5월에는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가는 김홍집을 따라가 직접 두묘 제조법을 배웠습니다. 귀국 후 한성에 종두장을 차려 본격적으로 우두 접종을 실시, 천연두 예방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천연두 지석영

 

천연두 예방과 치료의 기록 – 우두신설

지석영은 우두법에 대해 공부하고 경험한 내용을 꼼꼼하게 정리해 기록을 남겼는데, 그 의서가 1885년에 지은 [우두신설]입니다. 상하 2권 1책으로 되어 있는 [우두신설]의 상권에는 우두의 시종 및 치료 등 모든 치료법이, 하권에서는 소아 예방법이 담겨있습니다. 

의서에는 서양의 서적들과 일본에서 배운 우두법에 대한 지식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음을 물론이고, 직접 우두법을 시행한 과정과 경험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으를 통해 천연두는 ‘하늘에서 내리는 벌’이라 믿으며 죽음을 받아들였던 백성들에게 ‘예방이 가능한 질별’이라는 것을 계몽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두신설]의 집필은 이후 한국 최초의 예방의학서인 [신학신설]1891년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민간에서 참고할 만한 서구의 근대 의학 지식을 한글로 풀어쓴 책으로, 한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 이해할 수 있어 백성들의 건강 증진에 이바지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로도 천연두가 창궐할 때마다 [우두신설]은 최고의 지침서 역할을 해냈고, 이를 바탕으로 더 효과적인 치료법과 예방법을 개발하는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천연두의 예방률은 점차 늘어나고 발생률은 서서히 줄어들어, 1960년을 마지막으로 국내에서 천연두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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