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 50주년을 맞았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428km의 도로는 우리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수많은 최초,최대,최장 기록을 남겼다.
눈부신 경제성장의 토대가 된 경부고속도로, 그 이면에는 77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읽음 ‘암’도 존재함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성장과 개발은 ‘안전’을 담보로 할 때, 그 가치가 빛나기 때문이다.
출처: 박향아님 글
한강의 기적을 불러온 경부고속도로
국토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지 반세기가 지났다. 1968년 2월 1일 착공해 1970년 7월 7일 전구간이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총 429억 원이 들어간 초대형 국책사업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추진된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대한민국의 크고 작은 변화의 시작이었다.
기차로는 12시간, 기존 도로로는 15시간을 꼬박 달려야 도착할 수 있었던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이동 시간은 4시간30분으로 크게 단축됐다. 철도 위주의 수송 구조가 도로 위주로 바뀌면서 화물수송이 획기적으로 늘어났고, 1970년대 13만대가 채 되지 않던 자동차도 현재 2,500만대를 넘어설 만큼 증가했다. 이는 자동차 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져 현대자동차를 필두로 세계 5위권의 자동차 강대국으로 우뚝 서는 계기로 작용했다.
획기적으로 줄어든 부산과 서울 간의 이동 시간은, 부산항을 통한 수출의 증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경공업 중심의 산업이 수출 중심으로 근대화되면서 세계가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는 눈부신 경제발전의 초석이 된 것. 최대 규모의 경부고속도로를 온전히 우리 기술만으로 건설한 경험 역시 국내 토목 기술의 든든한 자산이 됐는데,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해외 건설을 통한 외화획득에도 크게 기여했다.
경부고속도로가 가져온 변화는 단지 경제적인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경부고속도로와 주요 도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전국 하루 생활권이 가능해졌고, 가까워진 거리는 국민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졌다. 도로를 통해 사람과 물류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문화와 생활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국가 균형 발전을 통한 현대화에 속도를 더하는 계기가 되는 한편,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가 정착됐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문 꼭 들러야 할 명소가 된 각 지역의 휴게소도, 고속도로 위 귀성행렬도, 전국의 명승지를 찾아 떠나는 수학여행도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계기로 나타난 새로운 풍경이다.
빛나는 기록 뒤에 숨겨진 77명의 희생
순수 국내 기술로 만든 ‘최초’의 고속도로, 단일 노선으로 동양 ‘최장’인 428km에 달하는 길이, 불과 2년 5개월이라는 ‘최소’건설 기간. 경부고속도로가 남긴 빛나는 기록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개발이라는 목적 아래 희생된 노동자 77명의 죽음이 존재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도로를 건설하기 위한 기술, 자본, 장비 중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춘 것이 없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 428km에 달하는 도로를 건설한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만큼 무모한 도전이었고, 전문가들은 당시 상황을 종합해볼때 완공까지 16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서는 핵심 사업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단기간 안에 마쳐야 했고, 428km의 고속도로를 불과 2년 5개월 만에 건설하는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무리한 공사 일정으로 인해 크고 작은 안전 문제가 발생했고, 이는 77명 사망이라는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졌다.
당시 경부 고속도로 공사에는 16개 건설사, 3개 군 공병단, 건설장비 165만대가 투입됐다. 공사에 투입된 인원만 해도 892만 8,000명. 이 중에는 도로건설에 대한 기술과 경험이 전무한 이들이 적지 않았음에도 이들을 위한 안전 교육은 턱없이 부족했다. 무리한 공사 일정에 맞추기 위해 애초 계획한 24m의 노폭을 22.4m로 줄이는가 하면, 비용과 기간을 줄이기 위해 중앙분리대를 비롯한 안전시설을 갖추지 못한 채 작업이 이뤄지기도 했다.
특히 당시 최장터널인 당재터널(현 옥천터널) 구간은 협곡에 위치해 진입로 설치가 불가하고 퇴적층 지대로 지반이 불안정한 난공사 구간이었다. 온종일 수백명이 공사에 참여해도 불과 30km 밖에 뚫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실제로 고된 노동과 위험한 현장 상황 때문에 공사를 포기하고 도망가는 작업자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발파작업을 하면 토사가 쏟아져 내리는 낙반 사고가 빈번히 발생했음에도, 경부고속도로의 마지막 준공구간인 만큼 공사를 멈출 수는 없었고, 당재터널은 많은 인명 피해를 낳은 끝에 예정대로 공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무리한 건설의 후유증
1968년 2월 1일 첫 삽을 떠 1970년 7월 7일 완공된 경부고속도로. 예정대로 2년 5개월 만에 공사를 마무리했지만, 무리한 건설의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개통 후 도로 곳곳에 부실이 발견됐고, 이로 인하여 안전사고도 끊이질 않았다.
완공 후 10년간의 유지보수 비용이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을 넘는 수준이었다니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경부고속도로가 남긴 가장 큰 오점이자 아픔은 안전이 배제된 무리한 공사가 불러온 안타까운 인명피해다.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금강휴게소에 세워진77명의 희생자에 대한 위령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세상에 금옥보다 더 고귀한 것은 인간이 가진 피와 땀이다. 그들은 실로 조국 근대화를 향한 민족 행진의 산업전사요, 자손만대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거축한 초석이 된 것이니 우리 어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은혜와 공을 잊을 것이랴.”
우리가 경부고속도로의 빛나는 기록 이면에 자리한 안타까운 희생을 기억하고, 안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