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대화재 사건으로 시작된 소방 역사
산이 많고 건조한 우리나라는 화재가 나기 쉬운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나무나 짚으로 만든 기와집과 초가집이 대부분이라 불씨가 집으로 옮겨붙으면 금방 크게 타올랐습니다. 집들도 서로 가까이 붙어 있어 한 집에 불이 나면 온 동네를 태우고 나서야 꺼졌습니다.
화재는 재앙이었습니다.
화재를 진압하고 나면 그 원인을 찾는데 많은 힘을 들이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예방에 힘을 씁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화재는 원인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많은 부분을 전소시키기 때문입니다. 하여 옛날에는 불이 나도 원인을 모르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게다가 화재를 진압할 시설과 기술이 없어 그저 불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으며, 불이 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출동해 불을 꺼야만 했습니다.
한양에서 발생한 화재
1426년 세종 8년에 무려 2,000여 가구가 화재로 전소되고 만 것입니다. 한 진에서 시작된 불이 온 마을로 삽시간에 옮겨붙었고 도성까지 퍼진 것 입니다. 화재는 다음날까지 이어지며 도성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가옥을 태웠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재앙의 원인을 밝히고 보니 바로 방화였습니다. 실수나 자연재해로 인한 화재여도 문제인데 의도적인 이유로 인한 화재였습니다. 세종은 크게 분노해 방화범에게 사형을 내렸고, 최초의 소방관청인 ‘금화도감’의 설치를 명했습니다.
최초의 소방서, 금화도감의 탄성과 발전
금화도감(禁火都監)의 뜻은 불을 금지하는 비상기구라는 의미로, 오늘날 소방서 입니다. 이에 앞서 고려 시대에도 금화제도라 불리는 비슷한 제도가 있었지만, 전문조직이 없었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관서는 금화도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금화도감 역시 요즘의 소방서와 차이가 있습니다. 불이 나면 달려가 불을 끄는 역할을 하는 곳이 아니라, 미리 화재를 예방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는 곳이라는 점에서입니다.
금화도감은 방화범을 고발하는 사람에게 신분 상승 등의 매우 큰 상을 내렸으며, 울타리나 담을 불에 잘 타지 않는 나무로 짓게 하는 등 백성들에게 화재 예방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또 주택과 도로 등의 정비를 통해 화재를 예방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가까이 불어 있는 집들 사이에 방화장(불을 막는 담)을 쌓아 쉽게 불이 옮겨 붙이 못하게 하거나, 적당한 거리마다 우물을 파 화재시 우물물을 활용해 불을 끌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마저도 없는 곳에는 다섯 집마다 하나씩 물독을 설치해 방화수를 저장해 두는 등 방화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불을 끄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성 내 도로를 넓히는 작업도 진행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화재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나라에서는 당분간 먹고 살 수 있도록 곡식과 살림살이를 내주었습니다.
하지만 금화도감은 계속 유지되지 못하고, 1460년 세조 6년에 와서 크게 할 일이 없어지면서 기구가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화재는 다시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이에 다시 21년 후인 1481년 성종 12년에 화재, 특히 도둑질을 하기 위한 방화가 많아지자 금화도감이 다시 부활하며, 이번에는 ‘수성금화사’라는 이름으로 격상돼 법제화되었습니다. 이 기구는 소방담당은 물론 궁궐과 도성의 수축과 개축까지 담당하며 그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폐지됐는데, 매우 오랜시간 제 역할을 해닌 것으로 짐작됩니다.
전문성을 갖춘 소방관, 멸화군
금화도감에는 소방관이 없다고 언급했는데, 소속되지는 않았으나 그 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금화군’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정식 대원이 아닌 군인이나 관청노비로 구성된 비상대기조였고, 물을 긷고 나르는 급수비가 그들을 따라다니며 도왔습니다. 그러다 1467년 세조 13년에 금화군은 멸화군으로 이름을 개칭하면서 더욱 전문적인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정원 50명, 24시간 대기조, 그리고 지급품은 도끼 20개, 쇠갈고리 15개, 삼끈으로 꼰 동아줄 5개. 그중 1명은 종루에 올라가 화재를 감시하고, 화재가 발생하면 종을 쳐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멸화군이 현장에 도착해 물에 적신 천과 급수비들이 퍼온 물을 이용해 불을 진압했고, 도끼로는 불이 붙은 건물을 무너뜨렸습니다. 또한 동아줄을 이용해 지붕에 올라가, 기와집일 경우 쇠갈고리로 기와를 걷어내고 초가집일 경우 짚더미를 치워버려 불이 번지는 걸 막았습니다. 종루 담당자는 불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종을 치고 소리를 질러 화재상황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렸습니다.
이러한 멸화군의 전문성과 능력은 시간이 갈수록 견고해졌습니다. 아이러닝하게도 당시 궁궐 안에는 불을 끄는 기구가 없었는데, 이를 도우러 나타난 이들이 바로 멸화군이었습니다. 이들이 커져가는 불길을 금세 잡아냈다는 기록이 1543년 중종실록에도 기록된 바 있습니다. 이후 멸화군은 조금씩 형태를 바꿔 오늘날에 이르렀으며, 다양한 소방도구들도 개발돼 1723년 경종 3년에는 서양의 수동펌프를 모방한 근대 소방도구가 개발되기도 했습니다.
금화령을 아세요?
세종에 앞서 태종은 1417년 금화령을 내린 바 있습니다. 실수로 자기 집에 불을 낸 자는 곤장 40대. 이웃집까지 불태운 자는 곤장 50대, 종묘나 궁궐까지 불태운 자는 사형에 처하는 법이었습니다. 또 궁궐 창고를 지키거나 죄인을 간수하는 관리들이 불이 났을 때 혼자 도망가면 곤장 100대를 쳤습니다. 금화도감은 세종 때 생겼지만, 불에 대한 두려움과 관리에 대한 필요성은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방화범에게 사형을 내린 세종의 처분 역시 이에 근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태와 드무
과자회사 이름으로 알고 있는 ‘해태’는 사실 시비와 선악을 판단한다는 상상의 동물로,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에 조선기대 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잦은 화재로 공사가 지연되자, 남쪽의 관악산이 휴화산인 이유로 화재의 빌미가 된다는 말에 광화문의 좌우에 해태상을 설치해 화재를 막고 길운을 빌었다고 합니다.
경복궁 안에는 ‘드무’라는 것도 있는데 이 역시 불을 막는 역할을 하던 용기입니다. 이 용기에 물을 가득 떠놓으면 불귀신이 들어왔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도망간다고 생각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옛 사람들에게 불은 귀신으로 생각할 만큼 갑작스럽고 통제가 되지 않는 두려운 존재였습니다.